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흥남 철수작전 (문단 편집) == 진행 == [[파일:흥남 철수 당시 사진.jpg]]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내려가겠다고 흥남부두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연합군의 북진 당시 그들을 환영하고 협력한 민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다시 인민군이 점령한다면 모두 반동으로 몰려 죽임당할 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데다가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스파이]]가 침투하여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대한민국 국군|한국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버리고 가느니 차라리 우리가 걸어서 후퇴하겠다!!"''' 며 극렬 반발했다.[* 남으로 후퇴할 육로는 중공군이 [[강원도]] 언저리까지 내려오면서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 말은 '''"피난민 버리면 우리는 단체로 [[옥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미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살의 '''[[https://ko.wikipedia.org/wiki/현봉학|현봉학]]''',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하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하니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를 받는다. 그 결과 무려 '''약 100,000명'''의 피난민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다. 이런 공로로 훗날 현봉학 박사는 2000년 4월 그리고 2013년 7월에 호국 인물로 지정되고, 2014년 12월에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6.25 전쟁]]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2018년 12월, 알몬드 장군은 2020년 9월,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동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에 선정되었다. 즉 미군들은 피난민 철수를 반대했지만 당시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민사 고문관 등 한국인들이 설득하여 피난민 철수가 극적으로 성사된 것처럼 알려져 왔지만 미국 국방성에서 비밀 해제된 흥남철수 당시의 10군단 사령부 지휘 보고서와, 10군단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 간의 무선통신 전문 등 9개 문서를 보면 1950년 12월 8일부터 "북한 피란민들을 구출하라"는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원수의 명령이 이미 하달되어 이 명령에 따라 철수가 진행된 것으로 당시 항해사였던 제임스 로버트 러니(James Robert Lunney) 역시 동일하게 증언을 하였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9332418?sid=104|#]][[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5/03/03/2015030300109.html|#]] 그리고 1950년 12월 14일 미 제10군단 사령부에서 일본 도쿄 극동군 사령부에 보낸 무선통신 내역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역시 북한 피란민들을 수송해 줄 것"을 유엔군 측에 요청하였다고 한다.[[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5/03/03/2015030300109.html|#]] 위와같이 피난민 구조 결정에 관한 기록들이 상이하므로 더욱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수기에 나오는 김백일 군단장과의 대화이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모두들 아우성이야.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낫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다른 이들의 증언 >"12월18일 철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알몬드 장군이 불러서 갔습니다. 장군은 [[함경남도]]지사[* 이는 당연히 북한 함남지사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에서 파견한 함남지사이다.]와 어느 목사 등 3명의 민간인만 데리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아연실색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적어도 100,000명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문제로 알몬드 장군과 옥신각신했습니다. 나는 나와서 곧바로 김백일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김백일 장군은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말했습니다. 참모들이 모두 동의했습니다. 19일 다시 알몬드 장군 측을 만났더니 '3,000명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로로 가겠다고 하자 '노, 노' 하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 - [[https://ko.wikipedia.org/wiki/유원식_(군인)|유원식]] 중령의 증언(<민족의 증언>: 중앙일보)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 [[https://ko.wikipedia.org/wiki/메러디스_빅토리호|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https://ko.wikipedia.org/wiki/레너드_라루|레너드 라루]] >"보잘것없는 살림살이를 든 많은 피란민들이 우리 군인들과 뒤섞여 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공산 정권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해졌다. 항구에 정박 중인 미국 배를 향해 수만 명의 피란민들이 차가운 바닷물을 헤치면서 걸어갔다." > - 육군 대위 헤이그[* 알렉산더 헤이그. 당시 알몬드 장군의 보좌관으로,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의 수기 중 >"그때 수송선(LST)의 앞 쇠문이 닫혀지고 있던 순간이었다. 피란민들은 필사적으로 닫히는 쇠문에도 매달렸다. 쇠문에 끼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쇠문을 잡으려고 팔을 뻗쳤다가 바닷물에 곤두박질하는 피란민도 있었다. 그러한 참상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착잡한 심정에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 -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2,700t 온양호에 수천 명을 태우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포개서 앉을 정도였습니다. 부두에는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습니다. 선두 쪽의 문을 닫을 때는 미처 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이 문 사이에 끼여 허덕이다가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에 탄 미군들이 배를 빨리 떼라고 허공에 총을 막 쏘았어요. 우리 배가 출항하자마자 흥남 시내가 불바다가 됐는데, 철수선을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아우성치던 그 많던 피란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 - LST 실습 항해사 황호채의 증언[[http://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5&nNewsNumb=20131213627|출처]] >문: "역시 군단장님의 공이 큰 거지요?" >답: "그렇지요. 그때 미군들은 안 된다고 그러고..." >문: "[[혜산]]진에는 들어갔어요?" >답: "나는 못 들어갔어요. 군단장님도 못 들어갔어요." >문: "민간인들은 어디에다가 상륙시켰습니까?" >답: "[[거제도]], [[제주도]], 그 다음에 일부 [[포항]], 묵호에도 조금 내리고. 그런데 주력은 역시 거제도와 제주도."[* 제주에 다수 피란민을 수송할 계획이 있었으나 거의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 - 김득모(당시 국군 제1군단 헌병대장, 소령)의 증언 >다음날 오후에 우리는 [[부산]]에 닻을 내렸다. 안심? 모든 얼굴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행의 종착역은 아니었다. >장교가 다가왔다. > >“여기 14,000명의 피난민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디다 그들을 내려놓을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여긴 안돼요.”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양적 군사적 이유를 수없이 들었지만, 우리의 황당함이란! 그리고 우리의 피난민들이 아직도 더 악몽같은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 >“[[거제도]]로 가시오.” 라고 그들은 말했다. “남서쪽으로 50마일만 가면 돼요.” > > -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편, 《로버트 러니와 흥남부두》pp.7~ 11 이 결정으로 12월 19일부터 민간인 철수가 시작되어 24일에 마지막으로 배가 떠났다. 100,000명의 피란민을 태운 상선과 LST는 목적지인 [[부산항]]으로 갔으나, UN군의 입항과 흥남에서 철수한 한국군과 미군으로 인해 입항이 거부되었고,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거제도]] [[https://ko.wikipedia.org/wiki/장승포항|장승포항]]에 피란민들을 하선시켰다. 또 이미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 50,000명도 거제도로 이동시켰다.[* 당시 [[함경남도]] [[원산]]에서 피란했던 이근용 씨는 [[거제도]]로 가야 정부가 월남한 피란민 대우를 해주었다고 하여, [[부산]]에서 거제로 다시 이동했다.] 이 중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 23일에 출항한 상선으로[* 가장 마지막에 출발한 배는 LST 온양호로 12월 24일에 출발했다.] 가장 많은 피란민을 태운 것으로 유명하다.''' ||<-4> {{{#white '''Guiness World Records'''}}} || ||<-4>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width=100]] || ||<-4> {{{#white ''' ''Largest evacuation from land by a single ship[br](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 '''}}} || || '''기록자''' || '''장소''' || '''규모''' || '''시일''' || || '''SS Meredith Victory'''[[http://www.guinnessworldrecords.com/world-records/largest-evacuation-from-land-by-a-single-ship|#]] || [[대한민국]], [[흥남]] || 14,500 명 || [[1950년]] [[12월 25일]] || [[https://ko.wikipedia.org/wiki/메러디스_빅토리호|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빅토리]]급 수송선으로, 철수 직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다. 이 배는 [[일본]]을 출발할 때 항공유를 잔뜩 싣고 왔는데, 흥남에 짐을 내릴 수 없자 [[부산]]으로 갔다가 배가 부족한 바람에 짐을 덜 내린 채 12월 21일에 다시 흥남으로 온 상태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공유|화물]]이 무엇인지를 안 다른 배들은 절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일:흥남 철수 사진.jpg]] >“흥남에서 피란민을 배에 태울 때 라루(Leonard LaRue·1914~2001) 선장은 사무장 로버트 러니(J.Robert Lunney·93·당시 1등 항해사)에게 ‘10,000명까지 카운팅하라’고 했어요. 10,000명을 돌파하고는 12,000~13,000명까지 세다가 더 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림짐작으로 '''14,000명'''이 탄 거죠.” - 이경필(김치 5)[[http://m.gjtline.kr/news/articleView.html?idxno=23381|#]] 사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꼭 피난민을 태워야 할 의무는 없었다.''' 적재한 화물의 위험성 등을 강조하여 그냥 가버려도 상관없었으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https://ko.wikipedia.org/wiki/레너드_라루|레너드 라루]] 선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울 수 있는 만큼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했다'''. 배에는 아직 '''300t의 항공유'''가 실려 있었으나[* 승선한 피난민들 중 일부가 이 항공유 드럼통 위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승무원들이 식겁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14,000명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전무후무한 규모의 해난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참고로 단일 선박에서 일어난 최악의 인명 피해인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사고]]의 비공식 사망자 수가 9,343명으로 항공유 폭발로 피난민 전원이 폭사했다면 이 기록을 5년 만에 갈아치웠을 것이다. ] 14,000여 명의 피난민과 경호를 위한 17명의 육군 헌병이 승선한 뒤 12월 23일에 흥남을 떠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무 일 없이 24일에 무사히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국군과 UN군으로 포화된 탓에 하선이 거부되고 [[거제도]]로 더 항해하여 장승포항에 하선했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항해 결과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으며, '''이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당시 선원들은 이 아기들을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463&yy=2013|'김치'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중 '김치5'였던 이경필 씨는 거제 장승포에 거주 중이다]].] 참고로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의 부모는 이 배가 아니라 미군 상륙함인 LST를[*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인 강한옥 여사의 기억에 따르면 부두가 폭파되는 광경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날은 12월 24일이다. 24일 흥남부두가 폭파되기 전 마지막에 출발한 수송선에는 LST 온양호가 있고 여기 타고 있던 실습 항해사 황호채가 말한 흥남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목격담과 상황이 일치한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전날인 23일에 흥남을 떠났다. 또한 문재인은 어머니의 기억에 항해 도중인 12월 24일에 미군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탕을 줬다고 했는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상선이고 민간인 선원들이 운항하던 배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탔던 미군이 있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인원들에게 사탕을 분배하던 일에 선원들을 놔두고 미군만 언급된다는 것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아닌 LST였을 것에 무게를 더해준다.] 타고 거제로 피란했다.[[http://www.gjn.kr/news/articleView.html?idxno=28756|#]]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철수 작전이었으나, 193척의 선박을 동원한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은 거의 피해 없이 철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여기에 100,000명의 피난민까지 함께 구해내는 기적을 일구어냈다. 게다가 작전이 종료되어 마지막 수송선인 온양호와 호위 전투함이 흥남을 떠난 날짜는 놀랍게도 12월 24일, 즉 '''[[성탄절|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때문에 보통 역사와 관련하여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하면 해외에선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의 [[크리스마스 정전]]을 가리키지만, 한국에선 이 흥남 철수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 10군단이 미처 배에 다 싣지 못하고 항구에 남겨둔 여러 물자는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12월 24일 14시 36분에 마지막 배가 흥남을 벗어나는 순간 흥남부두의 항구 시설과 함께 모두 폭파되었으며, 군인들과 피난민들은 그 폭파의 현장을 보면서 흥남을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12월 25일 아침 중공군 27사단이 흥남을 점령했다. 간발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당시 중공군은 한미연합군을 흥남에 몰아넣을 순 있었으나 피해가 막심해 섬멸시킬 수는 없는 상태였기에 한미연합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후 미 10군단은 철수 동안 수상/잠수함이나 기뢰 등 어떠한 종류의 공격도 받지 않고, [[부산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전의 결과, 최종적으로 철수한 인원과 물자는 다음과 같다. 흥남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경우처럼 몸만 빠져나온 철수는 아니었다. * 한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병력 105,000명 * 북한 피난민 98,100명 * 각종 차량 17,500대 * 각종 물자 350,000톤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 2005년 발행한 《6.25 전쟁 미군 참전사》에서 배에 탑승한 피난민들의 숫자는 100,000여 명, 그리고 타지 못한 피난민들의 숫자 역시 그와 비슷했다고 나와있다. 쉽게 말하면 전체 인원중 절반이 탈출에 실패 했다는 소리이다. 다른 여러 자료에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철수했다고 나오는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인데, 그 이유는 피난민의 종류가 '''두 가지'''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미 해병대]]에서 대표적인 전투로 손꼽는 [[장진호 전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자세하게 살펴보면 방어진 구성시 방어진 안에 있었으며, 얼마 뒤 배속된 [[한국 경찰]]의 조사를 받아 신원이 확실한 피난민은 철수 시에도 미군이나 국군과 같이 행군하며, 차량에 탑승하기도 하는 등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다. 하지만 방어진 바깥에 있으며 중공군이나 북한군과 접촉이 가능한 피난민의 경우에는 방어진 구성시에는 방어진 내부로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철수시에도 반드시 철수하는 군대 후미에서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는 것을 금했다. 이것만 본다면 매우 비정한 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피난민의 신원을 검증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신원 검증의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외모만으로 그 사람의 국적, 소속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을 괴롭히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일단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매우 힘들어지니. *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방어진 내부에 들어와서 파괴 활동이나 사격 관측을 하는 스파이 행위가 [[6.25 전쟁]] 중에는 매번 있는 일이었다'''. 이미 개전 초기부터 이런 것 때문에 진지 내부에서 저격을 받거나, 적의 포탄이 정확하게 탄약고를 명중시킨다든지, 야전병원이 습격당하는 일이 잦았던 UN군의 입장에서는 신원이 보장되지 않은 피난민은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수 차례 벌어진 이유 중에 하나도 이것이다. 민간인을 가장한 게릴라들의 습격과 파괴 행위에 시달리던 미군들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언어, 인종, 문화가 다른 민간인들과 사소한 의견 차이(혹은 오해)가 벌어지면 그냥 쏴 버린 것이다. 이후 [[이라크 전쟁]]이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똑같은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흥남 [[교두보]]가 형성되기 전에 교두보 내부로 들어온 피난민들은 최대한 구출했으나, 교두보 형성시 바깥에 있던 피난민들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스파이 침투시 철수 중 교두보의 붕괴로 대량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UN군이 애당초 교두보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게다가 흥남 교두보의 경계선에서는 육해공의 전 화력을 기울인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들여보내고 싶어도 못 들여보내는 이유도 있었다. 당장 아수라장의 격전이 벌어지는데, 피난민이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전선 내부로 들여보내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비슷한 이유에서 피난민끼리도 반목이 있었던 비극이 있다. 결국 이런 이유가 겹쳐서 흥남 교두보 내부에 있었던 피난민들은 대부분 구출되었으나, 외부에 있었던 피난민들은 교두보 외부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흥남 철수 작전으로 98,000명을 구출했는데, 교두보 밖에 있어서 미군을 따라 피난 온 인원도 그 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인원은 결국 탈출에서 제외되어 흥남에 남게 되었다. 흥남에 남았던 피난민 중에서 이후에 탈북을 성공한 피난민의 증언에 따르면, 고향에 돌아가도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고 행방불명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인원들이 탈출한 이유 중 하나는, '''흥남 일대에 핵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 같지만, 실제로 맥아더는 흥남 일대에 핵공격을 해서라도 미10군단을 구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대통령 등 지휘부에서 확전을 우려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없던 일이 된 것이다. 다만 생존자들에 의하면 국군이 각 집마다 문을 두들기며 >"핵 공격이 있을 것이니 대피하라" 고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념 여부에 상관없이 몇 십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이 발생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래와 같은 경우도 있었다. >피난민과 학도병, 국군을 가득 실은 목선은 남으로 뱃머리를 돌려 험한 파도를 뚫고 달렸다. 뱃머리에서 부서진 파도가 튀어들면서 얼어붙어 온 몸에 얼음조각을 뒤집어 썼다. 엄마 품에 안겼던 아이가 새파랗게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때 피난민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아이를 업고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여자를 노려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에미나이 남편이 빨갱이다이. 악질 빨갱이가 무슨 낯짝이 있서 이 배를 탔슴."'''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악바친 목소리로 아우성쳤다. "저년 죽이라우. 배에서 끌어내우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는 주르르 눈물을 쏟더니 이를 악물었다. 아이를 업은 채 배에서 뛰어내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아이와 여자를 꿀꺽 삼켰다.''' 그냥 있었어도 맞아죽었을 것이다. - 자유기고가 김용삼, <아비규환의 겨울 부두>, 《한국 현대사 119 대사건》, 101.p, 《월간조선》 엮음, 조선일보사, 19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